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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제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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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제주도의 역사를 알려고 하면 먼저 그 문화부터 이해해야 하며 제주문화를 인식하려면 먼저 문화기반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주도는 오늘날 얘기되고 있는 삼다(三多=石多·風多·女多)의 섬이기 이전에 재앙의 섬, 또는 삼재(三災)의 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이 땅에 살아온 제주인 들은 늘 한재(旱災)와 수재(水災)에 시달려야 했고 게다가 풍재(風災)에도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바로 이 삼재가 제주도의 문화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으며 제주인 들에게 고난과 시련을 안겨주었다고 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제주도가 놓인 특수한 지리적 위치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제주의 땅이 화산활동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리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도의 지층은 제3기말에서 제4기초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 기간 중 적어도 98회 이상의 용암분출이 일어나며 거의 모든 표충은 현무암(玄武巖)이 덮이게 된다.
제주도의 지층이 용암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은 이 땅에 살았던 제주인 에게 두 가지 어려운 시련을 부여하게 된다. 그 하나는 돌과 바위와 싸우며 토양층이 없는 거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지표수(地表水)가 없는 메마른 땅에서 물과 싸우며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주도는 연간 평균 1,900밀리나 되는 흡족한 강수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용암류로 생긴 지하의 무수한 공동과 균열로 말미암아 지상에 물을 가누기가 어렵다. 한국수자원공사에 따르면 연간 제주도가 강수량(降水量)은 총 33억 9천만 톤에 이른다. 그 가운데 44%(14.9억톤)가 지하로 빠져 버리고 37%(12.6억톤)가 증발산량(蒸發散量)으로 없어져 버린다. 인간의 생활과 농업에 필요한 표류소(漂流水)는 고작 19%(6.6억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 내륙지방에서 주종이 되었던 벼농사는 제주도에서는 불가능했고 밭농사라 할지라도 물 없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짓고 산 것이다.
다음 또 하나는 제주도가 놓인 지정학적 위치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주도가 서북에서 동남방향으로 휑하게 뚫린 대양 가운데 자리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시련을 더 해야 했으니 그것은 바람과 싸우는 일이었다. 제주도는 초겨울부터 이른 봄에 걸쳐서는 서북계절풍을 막 바로 받아 몸살을 앓고 늦봄에서 초가을에 걸쳐서는 태평양에서 일어나는 태풍을 받게 된다.
제주도의 가옥과 취락구조, 돌담, 숲, 골목, 꼬부랑길, 이 모든 현상이 바로 이 바람이 만들어낸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의 문화가 물과 비옥한 땅에서 일어난 것과는 달리 제주도의 문화는 물 없는 메마른 땅과 사나운 바람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고 제주 인은 그 속에서 재난과 더불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제주도의 역사는 재난의 역사요 재난과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할 것이다.



(2) 고대원주민들의 도래와 탐라의 대외관계
제주도의 원주민의 도래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 간에 주장이 대립되고 있어 아직도 정설은 없다.
제주도의 문화기반을 생각할 때 고대의 도래족(渡來族)은 약간의 표착족을 포함한 유만족(流亡族)으로 보고 있다. 그때만 해도 화산활동이 완전히 멎을 때가 아니었으며 또 농업에 적합한 토지 조건도 아니었다. 따라서 씨족연합사회 이후에 볼 수 있는 집단 이동이나 문화이동으로 보기보다는 사연을 지닌 종족들의 피난이나 유망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들은 한반도를 거쳐 온 한족(韓族)을 비롯하여 남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흘러들어 왔다고 생각된다. 특히 서복(徐福)집단이 일부를 포함 진한(秦漢)시대부터 볼 수 있는 중국의 망명인들 가운데 일부도 제주도에 도래한 채 그대로 잔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들 선착 족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주류를 이룬 것은 근세에 이르러 대거 도래한 한족이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뒤늦게 이동을 해오면서 제주문화는 이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고 하겠다.
탐라국(耽羅國)의 개국은 이들 유망 족 가운데 강력한 세력을 지닌 집단에 의하여 이룩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 세력가운데 씨족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고·양·부(高·梁·夫) 세 씨족집단 이었다고 생각된다.
개벽설화가 시사하고 있듯이 처음에는 고·양·부 세 씨족 연합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차츰 강력해진 씨족 중심으로 지배체제가 정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그 개국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문제다. 그 기간이 오랜 것은 단군(檀君)의 고조선 건국 이전부터 늦은 것은 통일신라 때까지로 벌어지는 너무나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 진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기원 1세기를 전후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여러 사서들을 놓고 보아도 국호는 통일돼 있지 않지만 탐라를 가리키는 기록들이 이미 5세기 이전부터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도이」(島夷) 「주호」(州胡) 등과 같은 기록들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탐라는 대체로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개국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택리지(擇里志)의 기원 65년 설 등 여러 학자들의 주장도 한(漢)시대의 기원설이 많지만 대체로 이 시기의 견해가 비교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탐라의 개국은 우리나라에서 백제·신라·고구려가 일어나던 삼국의 건국시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5세기 이후 탐라에 관한 여러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최초의 것은 탐라국이 문주왕(文周王) 2년(476)에 백제(百濟)에 방물(方物)을 바쳤다는 기록으로 시작되고 있다. 동성왕(東城王) 20년(498)에는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백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므로 탐라가 사절을 보내 사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 (文武王) 19년(679)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탐라는 왕권을 확립하여 독립국으로 존재하기는 했으나 백제가 강했을 때는 백제에, 신라가 강했을 때는 신라에 조공을 바쳤던 사실을 알 수 있고 항상 그들의 간섭을 받고 처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일본이나 중국의 사서를 종합해 보면 대체로 탐라는 476년부터 660년까지는 백제에 복사하였으며 661년부터 935년까지는 신라에 조공을 바치거나 사절을 보내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도 교역이 있었던 사실을 엿 볼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추적해 보면 탐라국은 선백제(先百濟) 후신라(後新羅)의 종속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938년(太祖 21)에 가서 고려(高麗)에 복사(服事)하게 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했던 기록도 여러 사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탐라에 관한 많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661년 탐라의 왕자 아파기(阿波伎)가 일본에 들어가 공물을 바친 것을 비롯하여 서로 사절을 보내거나 방물을 주고받는 등 빈번한 교섭이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어 일본과 탐라는 고대부터 깊은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 고려병합과 제주
후삼국을 멸망시킨 고려(高麗)는 처음 탐라까지도 정복하여 완전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탐라를 공략하려면 대 선단의 편성이 불가피 했으며 당시 고려는 그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늘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받고 있는 터였으므로 탐라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탐라는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하자 그 위세에 압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938년(태조 21) 12월 탐라 왕 고자견(高自堅)은 태자 말로(末老)를 고려에 입조시켜 방물을 바치고 국가의 안전을 도모했다. 이에 고려 태조는 신라 때의 예에 따라 고자견(高自堅)에게는 성주(星主)를 양구미(梁具美)에게는 왕자(王子)의 벼슬을 내려 국교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북방정책을 강화해야 할 입장인 고려로서는 남방에 독립해 있는 탐라국이 여러모로 경계의 부담을 주는 존재였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꾸준히 협상을 추진한 끝에 1105년(숙종 10) 5월 마침내 두 국가의 평화적인 합방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정사의 기록은 물론 자세한 자료를 찾기가 어렵지만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조건은 토주관제도(土州官制度)의 인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 때부터 탐라의 국호가 폐지되고 탐라군(耽羅郡)이 설치되어 여정(麗廷)에서 임명하는 고려의 관리가 수령이 되어 정사를 맡게 되지만 모든 권한이 전임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 때부터 이어온 성주·왕자제도가 그대로 존속되어 또 하나의 지방관부가 병립하게 되었으며 고려의 수령은 중요 정사에 관해서는 그들의 자문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이원정치(二元政治)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란이나 소요 사태 등이 일어났을 때는 수령은 성주·왕자의 힘을 빌지 않고는 진압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수령보다는 성주·왕자에게 도민들이 따르고 있었다고 할 것이며 그만큼 성주·왕자의 세력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이원정치는 그 뒤 원제국(元帝)의 직속을 거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1153년(毅宗 7) 11월 고려는 행정조직 개편을 단행 탐라군을 탐라현(耽羅縣)으로 개편하여 현령(縣令)을 두도록 하였다. 또 읍호도 개칭하였는데 이 때 비로소 「제주(濟州)의 이름이 생겨났다.
여정은 처음 얼마동안은 탐라령(耽羅令) 선임에 각별히 신중을 기했으므로 어진 목민관들이 도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가정주구(苛政誅求)하는 수령들이 나타나 가뜩이나 불만에 차있던 도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1168년(毅宗 22) 11월 양수(良守) 등의 민란을 시작으로 1202년(神宗 5) 10월 번석(煩石) 등의 민란, 1267년(元宗 8) 봄 (文幸奴) 등의 민란, 1318.년(충숙왕 5) 3월 사용(使用) 김성(金成) 등의 민란 등이 터져 나왔다. 이 무렵에 발생했던 민란의 원인은 대체로 ①고려의 영속에 대한 불만 ②수령과 관리들의 폭정에 대한 항거 ③가렴주구 관리들의 축출④고려관리에 영합한 성주·왕자들의 대한 불만 ⑤선량한 관리의 임명요구 등이었다고 한다.
민란이 발생하면 수령이나 고려관리들의 힘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했으며 그 때마다 성주·왕자들의 협력을 얻어 겨우 수습이 가능했다. 민란이 진압되면 그 주동자들을 가려 처형시켰지만 반면에 민중의 요구사항들이 행정에 반영되고 민심수습에 주력하게 되었으므로 그 얼마동안은 평정이 유지되기도 하였다.


(4) 삼별초의 난과 원의 지배
삼별초(三別抄)의 난은 제주도의 역사상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주도가 큰 전란의 무대로 등장하고 고려문화를 일시에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백년에 걸친 원(元) 지배의 전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1270년(元宗 11) 6월 원의 침략과 이에 굴욕적 강화를 맺은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 났던 삼별초의 난은 당초 강화도(江華島)에서 발발하지만 그 무대는 진도(珍島)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지게 된다. 난을 일으킨 삼별초는 강화도에 묶어 두었던 1천척의 선박으로 곧 진도로 이동, 이곳에서 약 1년 남짓 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항쟁하고 있는 동안에도 최후의 항쟁지가 제주도가 되리라고 예상했던 것은 삼별초나 여원(麗元)연합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려관군은 1270년 9월 영암부사(靈岩府使) 김수(金須)와 장군 고여림(高汝林)에게 군사를 딸리게 하여 먼저 제주도로 파견, 삼별초의 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를 지키도록 하였다.
한편 삼별초도 이 정보를 듣고 이문경(李文京)을 대장으로 선발군을 편성 제주도를 쟁취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진도에서 삼별초가 패전하기 이전부터 이미 전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삼별초 선봉부대를 이끈 이문경은 1270년 11월 명월포(明月浦)로 상륙작전을 감행, 관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으나 상륙에 성공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이어 동제원(東濟院) 전투에서도 승리하고 마침내 송담천(松淡川)전투에서 관군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이 때 김수(金須) 고여림(高汝林) 등 관군의 지휘관들도 전사했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삼별초가 장악하게 되었다.
장군 김통정(金通精)이 이끄는 삼별초의 본진이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그 이듬해인 1271년(文宗 12) 5월 진도전투에서 여원연합군에 패전한 뒤였다. 삼별초는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토성과 석 성 내외 성으로 된 항파두성(缸坡頭城)을 쌓아 본 거로 삼았으며, 애월(涯月)·명월(明月) 등 요소에는 성을 축조하고 해안 일대는 먼저 관군이 축조해 놓은 이른바 환해장성(環海長城)을 보축하여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했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제주도를 본 거로 내륙지방에 빈번한 기습작전을 감행, 여원연합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수차에 걸친 협상에 실패한 여원군은 원의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을 원수(元帥)로 삼고 1만 여의 연합군을 편성 제주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1273년(원종 14) 4월 28일 새벽을 기해 좌익군을 비양도(飛揚島)에 투입시키고 중 군을 함덕포(咸德浦))로 상륙시켰다. 상륙전을 비롯하여 파군봉전투, 항파두리전투 등 삼별초와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삼별초가 전멸하고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삼별초가 전멸한 뒤 원제국은 다루가치총관부를 두어 군사를 그대로 제주도에 주둔시키는 한편 1275년(忠烈王 1)에는 제주(濟州)를 탐라(耽羅)로 복호시키면서 원의 직속령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1373년 8월 최영(崔瑩)장군이 이끄는 2만5천 대군이 상륙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할 때까지 약 1백년에 걸치는 원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사이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제주도의 반환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으며 원도 이를 받아들여 1294년(충렬왕 20)과 1305년(충렬왕 31)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를 고려에 환속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제주도에서는 민란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발생했다. 원은 그를 구실로 다시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14세기에 이르러 원 제국은 점차 세력이 기울다가 1368년에 마침내 새로 일어나 명(明)나라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의 원 세력이 동시에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명제(明帝)는 원의 목호들이 기른 제주의 말을 공헌하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며 목호들은 이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①1356년(공민왕 5) 10월 가을적홀(加乙赤忽) 고탁(古托) 등의 난 ②1362년(공민왕 11) 8월 고독불화(古禿不花) 등의 난 ③1372년(공민왕 21) 3월 석가을비(石加乙碑) 등의 난 ④1374년(공민왕 23) 8월 합 적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등의 난이 그것이다.
이들 목호의 세력은 워낙 강하였으므로 관군의 힘으로 진압하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관군이 패전하여 철수하는 사례까지 일어났다. 여정은 마침내 최영(崔瑩)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이들 목호를 소탕하도록 명령했다. 최영은 2만5천여 대군을 이끌고 1374년 8월 28일 명월포(明月浦)에 상륙 격전 끝에 3천에 이른 목호의 세력을 완전 섬멸시켰다. 이로써 제주도는 백년에 걸친 원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진주와 원의 장기간에 걸친 점거는 제주로서는 엄청난 수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는 얻은 것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낙후 고립됐던 제주도에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고려의 중심문화였던 개경문화(開京文化)를 도입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주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문화의 한 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5) 조선의 지배정책
1392년(太祖 1) 고려를 멸망시키고 근세 조선왕조를 개국한 조선조는 중앙집권화정책을 강화하면서 제주도에 대하여는 한편으로 점진적 동화(同化)정책을 펴 나갔다.
먼저 신라·고려시대를 통하여 꾸준히 이어온 성주·왕자제조의 개편에 착수했다. 성주·왕자는 왕통(王統)을 잠칭(潛稱)한다고 하여 1402년(太宗 2) 10월 성주 고봉례(高鳳禮)와 왕자 문충세(文忠世)를 입조시켜 국적(國籍)과 인부(印符)를 자진 헌상하도록 하는 한편 고봉례(高鳳禮)에게는 좌도지관(左都知官) 문충세(文忠世)에게는우도지관(右都知官) 벼슬을 내려 실권이 없는 토주관(土州官)제조를 도입시켰다.
1445년(태종 16)에는 도지관(都知官)제도도 수령과 병립하여 도민에게 많은 부담이 되고 있다고 하여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정·부진무(正·副鎭撫)제도를 두게 하고 그동안 고씨를 비롯한 왕족이나 귀족이 세습하여 온 것을 주인(主人) 가운데 우수한 사람이면 누구나 선임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업무도 오직 국방상 지원이 필요한 업무만 관장하도록 축소시켰다. 그러나 뒤에 가서는 그것마저 혁파시키고 유향직(留鄕職)으로 통일시켰다.
1416년(태종 16)에는 14세기 초부터 시행돼오던 동·서 도현제(道懸制)를 폐지하여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한라산 동서 분수령을 계기로 산북지역을 제주목(濟州牧)으로 산남지역을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을 정의현(旌義懸) 서쪽을 (大靜縣)으로 삼았다. 이른바 삼읍(三邑) 행정구역을 확정한 것이다. 이 삼 읍 행정권은 조선시대 말인 1906년까지 이어져 5백년동안 제주도의 정치·경제·산업·사회·교육·문화·군사 등 전 분야에 걸친 구획단위로 정착하게 된다.
1415년(태종 15)에는 수조법(收租法)을 제정하여 관리가 함부로 징수하던 전세(田稅)를 토지의 척박, 지품(地品)의 차등, 백성의 빈부 등에 따라 수조 하도록 제도 화 하였다. 이와 함께 마필(馬匹)의 공부(貢賦)에 있어서도 민호의 빈부차 등을 고려하여 대소 3등급으로 나누어 세공(歲貢)하도록 하였다.
1427년(세종 9)에는 ①전리(典吏)들의 전횡 ②수령들의 수렵에 따른 전 작물 피해 ③토호(土豪)들의 봉족(奉足) 구사 ④감귤의 강제 징수 ⑤세공을 빙자한 관리들의 착취 등 누적되어온 악폐들을 일소하고 서정을 쇄신하였다.
특히 삼 읍의 향교(鄕校)를 비롯하여 동서의 학당 그리고 요소 요소에 서원이나 서당 등을 세우고 교수관(敎授官) 또는 훈도(訓導) 등을 두어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제주도의 모든 선비 자녀들이 교육을 받고 국시(國試)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합격자는 조정이나 지방의 관리로 출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고려때 일부 왕족이나 귀족에게만 주어졌던 특전을 개방하여 널리 인재등용의 길을 트게 한 것이다.
이와 아울러 귤림서원(橘林書院)·삼성사(三姓祠)·관덕정(觀德亭)·향현사(鄕賢祠)·송죽사(松竹祠)·향사당(鄕社堂) 등 여러 가지 문화시설 등도 창건하여 중앙의 여러 시책이 내륙지방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도 고루 보급될 수 있도록 교육문화시책에 주력하였다. 한편 연해지역 요소에는 축성하여 방호소와 수전소(水戰所)를 두었으며 봉수대와 후망소(候望所) 등 여러 방어시설을 갖추고 각 각 병력과 장비 등을 배치하여 국방에도 대비하였다. 그밖에도 감귤의 권장을 비롯하여 산업의 진흥에 노력하였으며 인구분산 정책을 시행하여 재난과 범죄의 예방 등 민생의 도모에도 노력하여 중앙지배체제를 정비 강화해 나갔다.

(6) 유망인과 유배인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제주도에는 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고려의 유신을 비롯하여 정치적 피난민들이 대거 도래하는 사실이다. 이들을 흔히 유망인(流亡人) 또는 유민(流民)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주인의 계보를 살펴보면 고·양·부 세 씨족처럼 이미 고대 때 도래하여 일찍 토착한 씨족들이 있지만 그들은 전체 인구로 보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때도 일부 도래한 씨족들이 있지만 그들도 10여 성에 지나지 않으며 한 두 성을 제외하면 벌족을 이루지도 못하고 있다.
제주인의 주류를 형성한 성씨는 거의가 조선시대 이후에 들어온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들어온 연대를 보면 조선이 개국한 직후인 15세기 초부터 16세기에 걸쳐 대거 입도 하고 있다. 이들이 곧 벌족을 이루고 주류를 형성한 제주인의 입도 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입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새 왕조에 출사(出仕)를 거부한 고려유신을 비롯하여 당쟁이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 권력과 불의에 반항했던 사람, 관직이나 관료사회에 회의를 느낀 사람, 유배되었다가 그대로 정착해 버린 사람 등 거의가 정치적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망인과 함께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유배인(流配人)들의 도래라고 할 것이다. 제주도를 유형지(流刑地)로 삼은 것은 따지고 보면 그 시초가 원(元)나라였다고 할 수 있고 명(明)나라와 고려가 그를 답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배지로 정착시켜 우리나라의 「유형 1번지」로 만든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오고 나서였다고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사람들을 보면 14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광해군(光海君)을 비롯하여 해원군(海原君·李健)·해안군(海安君)·해평군(海平君)·경선군(慶善君)·경완군(慶完君)·경안군(慶安君)·임창근(臨昌君)·임성군(臨城君)·여천군(驪川君)·은언군(恩彦君)·은신군(恩信君)·이명혁(李明爀)·이하전(李夏銓) 등 왕족과,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인목대비(仁穆大妃)어머니·신익성(申翊聖)·장희재(張希載·張禧殯오빠)·홍낙임(洪樂任)·박영효(朴泳孝) 등 외척과 부마(駙馬) 등도 많았다.
이경여(李敬輿)·송시열(宋時烈)·이건명(李健命)·서지수(徐志修)· 등을 비롯한 재상 대신들이 많았으며, 홍유손(洪裕孫)·김정(金埩)·유희춘(柳希春)·정온(鄭薀)·신명규(申命圭)·송시열(宋時烈)·김진구(金鎭龜)·김춘택(金春澤)·임징하(任徵夏)·조관빈(趙觀彬)·김성탁(金聖鐸)·조정철(趙貞喆)·김정희(金正喜)·최익현(崔益鉉)·김윤식(金允植) 등 석학과 문인들, 보우(普雨)·정난주(丁蘭珠)·이승훈(李昇薰) 등 종교인들, 그밖에 각 분야에서 한 시대를 움직이던 역사적 인물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망인과 유배인 들이 들어오면서 제주문화는 이들에 의해서 형성 발전돼왔다고 할 것이다. 제주인 대부분이 이들 유망인 들의 후예로 그 뼈대 높은 혈통을 이어 받았으며 이들 유배인 들에 의해서 교육을 받고 그 영향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제주도의 문화·사상·정신을 규명하자면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그 본질을 캐낼 수 없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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